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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보배' 이하늬가 돌아왔다.(국민문화신문) 유에스더 기자 = ‘믿고 보는 배우’ 이하늬가 영화 ‘유령’으로 스크린에 돌아온다. 사진 = 사람엔터테인먼트, CJ ENM, SBS ‘원 더 우먼’,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삼화네트웍스, CJ엔터테인먼트 ‘유령’은 1933년 경성, 조선총독부에 항일조직이 심어놓은 스파이 '유령'으로 의심받으며 외딴 호텔에 갇힌 용의자들이 의심을 뚫고 탈출하기 위해 벌이는 사투와 진짜 ‘유령’의 멈출 수 없는 작전을 그린 영화. 극 중에서 이하늬는 항일조직 ‘흑색단’의 스파이 ‘유령’으로 의심받는 총독부 통신과 암호 전문 기록담당 ‘박차경’으로 분해, 새로운 연기 변신을 감행한다. 이하늬는 박차경 역할에 대해 “그간 웜톤에 가까운 캐릭터를 해왔는데 박차경은 쿨톤 캐릭터다. 겉은 차가워 보이지만 내면에 많은 슬픔이 용광로처럼 있는 인물”이라며 지금까지 보여줬던 것과는 다른 모습을 예고했다. 또한, 액션에 대한 질문에는 “6개월 동안 운동을 쉬지 않고 하면서 액션을 준비했다”, “장총을 사용하는 액션이 많았는데 실탄을 가지고 연습을 하기도 했다”라고 전해 그 어느 때보다 몸 사리지 않는 액션을 펼쳤을 ‘유령’ 속 이하늬에 관심이 모인다. 특히 지난 ‘유령’ 제작보고회에서 이해영 감독은 “처음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떠올리면서 '이하늬가 필요하다. 이하늬만 있으면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싶었다”라며 유령의 첫 시작이 이하늬임을 밝혀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어 그는 "백지에 이하늬라는 점을 찍었더니 '유령'이 됐다"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아, ‘유령’에서 보여줄 이하늬의 새로운 모습에 기대감을 높였다. 그동안 이하늬는 다양한 작품에서 남다른 캐릭터 소화력으로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드라마 ‘원 더 우먼’에서는 비리 검사와 재벌 상속녀를 오가는 1인 2역을 완벽하게 소화해 연기 스펙트럼으로 입증했으며, 영화 ‘블랙머니’에서는 냉철한 이성을 지닌 금융 변호사 역을 맡아 깊이 있는 연기로 호평을 얻은 바 있다. 뿐만 아니라 1,626만 명의 관객을 동원한 영화 ‘극한직업’, 역대급 통쾌한 사이다 드라마로 탄탄한 마니아층을 양산한 ‘열혈사제’ 등의 작품에서 맹활약하며 ‘믿고 보는 배우’에 등극했다. 이렇게 몸을 사리지 않는 액션과 깊이 있는 연기로 장르에 구애 없는 연기 활동을 펼치고 있는 이하늬가 ‘유령’에서는 어떤 색다른 모습으로 관객들을 사로잡을지 벌써부터 이목이 집중된다. 한편, 이하늬 주연의 영화 '유령'은 오는 1월 18일 개봉을 앞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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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대회 5∼6일 경주서 개최…"국내외 성과 종합 검토"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한국고고학회와 함께 '제45회 한국고고학 전국대회'를 5∼6일 경주 화백컨벤션센터에서 연다고 3일 밝혔다. 고고학대회는 고고학계에서 가장 큰 연례 학술 행사로, 올해 주제는 '한국 고고학, 한반도를 넘어서'이다. 두 기관은 이번 학술대회에서 한반도라는 경계를 넘어 국내외 연구 성과를 종합적으로 검토하고, 선사시대와 고대를 해석하는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고 설명했다. 첫날에는 '한국 고고학 조사와 매장문화재 제도 변천' 발표에 이어 '실크로드 고고학', '고고학의 외연 확장을 넘어, 새로운 패러다임의 모색', '동북아시아 속 한반도' 등 3개 분과로 나뉘어 주제 발표가 진행된다. 이튿날에는 '한국 선사·역사시대 고고학 자료의 생산과 유통',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박물관의 고적 조사', '고고학 자료에 대한 연결망(네트워크) 분석의 적용과 활용 가능성', '고고학 지리정보시스템(GIS) 데이터, 정보를 넘어 지식으로', '2020년도 국내 중요 유적 발굴조사 성과' 등 5개 분과별로 연구 성과를 공유한다. 경주 월성.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연합뉴스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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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우리 공원, 수많은 기독교인들 이곳에 잠들다망우리 공원. (서울=국민문화신문) 정예원 기자= 서울 중랑구 망우리공원에는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잠들어 있다. 최근, 서울의 대표적 공동묘지인 망우리공원을 테마로 망우리공원 속 기독교계 인물을 정리한 책이 출간됐다. 망우리공원에는 기독교인들의 무덤이 많은 편이다. 이들 가운데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유명인사들 이야기를 중심으로 김영식 작가는 3월 초 ‘망우리 언덕의 십자가’를 출간됐다. 최근 역사공원으로 새롭게 단장되고 있는 망우리 공원은 1933년부터 1973년까지 공동묘지로 사용됐다. 이곳에는 한용운, 오세창, 문일평, 방정환, 조봉암 등의 독립지사와 시인 박인환, 화가 이중섭, 조각가 권진규, 극작가 함세덕 등의 문화예술인이 한데 모여 있어 ‘거대한 근대사박물관’으로도 불리고 있다. 또한, 망우리공원은 기독교계 인물로서 애국지사뿐 아니라 안타까운 변절이나 오랫동안 소외된 죽음, 일본인 두 명도 망우리공원에 모두 안치되어 있다. 이는, 기독교 정신을 보다 분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그렇기에 망우리공원은 현충원보다 더욱 다양한 종교적·인문학적 스토리를 간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망우리공원에 잠든 사람들의 간단한 약력을 표시한 안내판. 망우리공원의 사잇길. 망우리공원은 1997년부터 시민들이 즐겨 찾을 수 있도록 공원화 사업을 추진해 다음 해에 4.7 킬로미터의 산책로 ‘사색의 길’을 조성했다. 몇 해 전에는 ‘인문학길 사잇길 코스’도 만들어졌다. 이곳에서 기억하게 되는 이들의 삶과 문학, 음악, 회화는 지금까지도 남아 자양분이 되고 있다. 망우리공원의 ‘사잇길’은 망우리공원의 자연경관 조망 및 묘지 속의 사색과 함께, 그 어느 때보다도 격동적인 근현대사를 살다간 유명인사 50여 명과 서민의 이야기를 비명을 통해 체험할 수 있는 코스로 조성됐다. 삶과 죽음 사이를 걸어가다 보면 근심은 저절로 잊혀지게 된다. 역사문화코스, 인문학길 사잇길 코스, 서울둘레길 2코스 등이 조성된 공원은 2013년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근심 먹는 우체통. 근심 먹는 우체통의 망우 엽서. 망우리공원 삼거리에는 ‘근심 먹는 우체통’이 있다. 빨간 우체통이 눈에 확 들어오면서 힘들었던 몸과 마음에 생기를 불어 넣어준다. 망우역사공원을 찾을 때마다 근심과 걱정을 하나씩 엽서에 적어 넣으라는 안내 문구는 마음의 위안을 준다. 근심 먹는 우체통의 망우 엽서는 망우본동 주민자치회에서 제작해 배부하고 있다. 근심거리와 걱정거리를 써서 넣어두면, 주민자치회에서 정기적으로 수거를 해 근심을 나누겠다고 한다. 근심을 서로 나누고 해결하려고 함께 노력을 한다면, 그 근심의 정도가 적어진다는 근대문화 공간다운 발상이 참으로 독특하다. 유관순 열사의 분묘 합장 묘역. 유관순 열사의 연보. 망우리 공원에는 작은 거인이라고도 불리는 유관순 열사의 분묘 합장 묘역이 있다. 지난 해 9월 26일, 순국 100주년을 맞아 중랑구는 이곳에서 추모식을 가지기도 했다. 이미 이곳에는 유관순 열사를 기억하고자 다녀간 많은 이들의 흔적이 남아있다. 유관순 열사. 유관순 열사는 할아버지와 작은 아버지의 영향으로 한국 기독교 순교자로 활동했다. 교육과 교회를 대하는 아버지의 태도는 어린 유관순에게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정동교회 손정도 목사와 이화학당의 박인덕 선생은 어린 유관순에게 민족과 신앙을 가르쳐준 사람이다. 손정도 목사는 만주 하얼빈에서 활동했던 신앙과 민족정신이 투철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녀는 조선총독부가 휴교령을 내리자 그녀는 3월 13일 고향으로 내려와 자신의 일생 신앙생활을 했던 매봉 교회 교인들과 함께 만세시위를 준비했다. 1919년 3월 31일 유관순이 매봉산에 올라 기도를 드렸던 기도문은 다음과 같다. “오오, 하나님이시여 이제 시간이 임박하였습니다. 원수 왜를 물리쳐 주시고 이 땅에 자유와 독립을 주소서. 내일 거사할 각 대표에게 더욱 용기와 힘을 주시고, 이 민족의 행복한 땅이 되게 하소서. 주여 같이 하시고, 이 소녀에게 용기와 힘을 주옵소서. 대한독립만세, 대한독립만세!” 10대 소녀의 기도문이라고는 힘들 정도로 놀랍다. 당시의 상황이 얼마나 처참했고 두려웠을지 기도문에서 느껴진다. 만세운동이 예정되었던 4월 1일 당일에는 3천 명이 모여들어 병천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조병옥 박사의 아버지 조인원의 독립선언서 낭독에 이어 유관순이 독립연설을 일장 하고서 시위를 시작했다. 유관순은 이날 현장에서 체포되어 천안 헌병대에 송치되었다. 3.1만세운동의 상징과도 같은 유관순 열사는 아우내장터 만세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투옥되어 18살의 꽃다운 나이에 1920년 9월 28일 서대문 형무소에서 세상을 떠났다. 일제는 보름이 지난 후에야 시신을 인도했고, 10월 14일 일본 경찰의 감시 속에 비석도 없이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가 이곳 망우리 공원에 안치되어 위령비를 세웠다. 한편, 2009년 <그와 나 사이를 걷다-망우리 사잇길에서 읽는 인문학>(호메로스)을 펴낸 김영식 작가는 ‘망우리 언덕의 십자가’라는 제목으로 서울 중랑구 망우리를 중심으로 한국 기독교의 역사를 깊숙이 탐구했다.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16인이 기독교계 인물이었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기독교는 우리나라의 근대화와 독립운동뿐 아니라 해방 후의 산업화와 민주화에도 크게 기여했다. 한국 기독교 역사의 발자취를 담은 김영식 작가의 역작 ‘망우리 언덕의 십자가’에는 총 24인의 기독교인이 수록돼 있다. 우리나라 기독교 최초의 유아 세례자 서병호, 최초의 여성 기독교 장로 김말봉, 초기 기독교인으로 독립운동에 앞장선 안창호, 유관순, 유상규, 이영학, 서광조, 강학린 등의 애국지사, 해방 후 신앙의 자유를 찾아 월남한 아동문학가 강소천 등이 기독교와 함께한 자신의 삶은 물론, 그들 삶의 배경이 되는 한국 기독교의 역사를 전해주고 있다. 지은이는 1부에서는 안창호, 유관순 등 한 알의 밀알이 되어 나라에 목숨을 바친 12인의 애국지사를, 2부는 교육과 문화를 통해 이 땅에 씨앗을 뿌린 12인의 인물을 중심으로 소개한다. 이들 중 안창호, 서병호, 문명훤, 김봉성, 강학린 등 5인은 현충원 등으로 이장되었으나 망우리 공원에 남겨진 비석은 그들의 자취를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비석(금석문)은 역사의 증거가 되는 소중한 문화재로 남았다. 끝으로 김영식 작가는 “망우리 공원을 걸으며 실제 삶에서 기독교 정신을 실천하고 소천한 분들을 찾아, 그들을 기리는 동시에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계기를 얻었으면 한다. 나아가 망우리공원이 새로운 성지순례의 장소로서도 부각 되기를 바라 마지않는다.”고 전했다. 우리나라 기독교의 역사를 알아야 우리 근현대사의 전모를 볼 수 있기에, 이 책은 기독교인에 한정하지 않고 인문학을 즐기는 교양인의 필독서가 될 것이다. 또한, 망우리공원은 우리 나라의 다양한 종교적·인문학적 스토리를 간직하고 있으며, 꼭 기억해야 될 문화유산이기도 하다. 많은 종교인과 인문학을 즐기는 교양인들이 이곳, 망우리공원을 찾아 실제 삶에서 기독교 정신을 실천하고 소천한 분들의 정신을 느끼는 시간을 가지길 바란다. 따라서, 현재 우리는 기독교계 역사 속 인물들을 통해 기독교가 우리나라의 근대화와 독립운동뿐 아니라 해방 후의 산업화와 민주화에도 크게 기여한 역사적 사실을 기억하고, 3.1운동 정신과 가치를 되살리는 지원체계 마련을 위해 노력해야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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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년의 역사가 깃들인 숭의 여자 대학교, 그 역사적 발자취를 찾아서숭의 여자 대학교 전경. (국민문화신문) 정예원 기자= 118년의 역사를 가진 숭의여자대학교는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사립 여자 전문대학교이다. 일제에 항거하며 각자의 위치에서 조국을 지킨 독립유공자들을 이곳, 숭의여대에서 만날 수 있다. 김경희, 최형록, 이효덕, 안정석, 구순화, 김온순 등의 독립유공자를 다수 배출한 숭의여자대학교는 1903년 평양에 개교한 조선 최초의 여학교이다. 과거 우리나라 여성들은 가부장권이 철저히 확립된 채 순종과 인내를 강요당하며 살아왔다. 여성들은 가사 노동이 중심이었고 사회활동, 경제활동 등에서는 배제되었다. 그러나 조선 말 쇄국 정치가 무너지고 서양 여러 나라와 통상이 이루어지며 기독교가 전파되면서 여성들의 자각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1884년 7월에 맥클레이에게 허락한 고종의 선교 윤허는 학교와 병원 사업에 국한되었다. 의료선교는 1885년 알렌에 의해 광혜원이란 병원이 세워졌고, 학교 선교는 언더우드, 아펜젤러, 스크랜튼 등에 의해 서울에서 남녀 학교가 세워지고 지방에도 선교부 또는 지방 교인들이 세운 기독교 학교가 늘어났다. 기독교의 의료, 교육 선교 정책이 뿌리를 뻗어 사회에 새로운 풍조를 일으키자 여성 교육의 필요성이 고조되었다. 그러던 1903년 한국 역사의 여명기에서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마포 삼열 목사가 교육과 선교를 목적으로 근대 서구식 교육을 시작함으로써 숭의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숭의의 설립자인 마포 삼열 목사는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무수한 위기와 수난을 겪으면서도 불굴의 의지로 한국인의 복음화를 위해 헌신했다. 그는 치밀한 계획과 정확한 상황 판단으로 일을 추진했으며, 신도들과 함께 기도하며 말씀으로 어린 양들을 양육하는 겸손하면서도 뜨거운 열정을 가진 하나님의 종이었다. 1897년 여성 교육의 깃발을 들고 평양에 하나님의 진리와 신문학을 가르치는 새 교육기관인 ‘예수교소학교’가 설립되었다. 학제는 6년 과정으로, 1903년제 1회 졸업생 3명 김애희, 김유선, 김경희가 배출되었다. 예수교소학교를 나온 세 명 졸업생들의 진학을 위해 중등교육을 실시하자는 마포삼열목사의 계획을 선교부에서 받아들여, 1903년 10월 31일 조선 최초의 여학교, 숭의여학교가 탄생되었다. 1908년 5월, 숭의여학교 제 1회 졸업생인 김보원, 김유선, 김경희, 김애희, 김신보는 3·1 만세운동과 함께 독립운동의 길에 들어섰다. 숭의는 ‘의를 높이고 숭상한다’는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지식을 가르치는 일보다는 그리스도의 사랑, 봉사 실현에 더욱 힘썼으며 그리스도의 정신에 입각하여 완숙한 인간성을 형성하도록 노력했다. 김보원은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가담하고 1919년 ‘애국부인회’를 조직한다. 애국부인회는 뜻을 함께할 이들을 모으고 회비를 걷어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했다. 김유선은 3·1운동 후 전도대를 조직해 독립정신 함양에 힘을 기울였다. 1910년 한일강제병합 후 일제가 식민지 정책을 본격적으로 펴나가자 1913년 숭의여학교 졸업생으로 숭의여학교 교사를 거쳐 숭현여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김경희는 숭의여학교 교사였던 황애덕 선생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는 여성 비밀 결사대인 송죽회를 조직했다. 숭의의 교사들은 수업 과정에서 애국, 애족사상을 은밀히 주입시켰다. 특히, 명성황후 시해 사건과 1919년 고종의 붕어는 일본에 대한 적개심을 불타오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송죽회 대원들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는가 하면 모금 활동을 통해 마련한 자금을 상하이 임시정부로 송금하며 독립운동을 펼쳤다. 또한, 3·1운동 전 몰래 200여 개의 태극기를 만들어 3·1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후 1930년대 들어 일제의 식민정책이 ‘민족말살정책’으로 한층 노골적으로 변하면서 탄압의 강도가 더욱 세졌다. 이 당시 일제가 신사참배를 더욱 강요하면서 기독교계 학교와의 대립은 더욱 심화됐다. 일제의 신사참배 요구가 계속됐으나 당시 숭의여학교 교장이었던 선우리 교장은 요구를 거부하며 1936년 1월 18일 답변서를 제출하였지만, 이에 조선총독부는 숭의여학교를 폐교하고, 선우 교장을 직위 해제하기에 이른다. 결국, 이 땅의 여명기에 많은 여성 인재를 길러 새 역사 창조에 크게 기여한 명문 여학교 숭의여학교는 신사참배라는 부당한 강요에 맞서 싸우다 마침내 스스로 문을 닫게 되었다. 1952년 당시 박현숙 선생은 숭의 재건을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일제의 강요에 항거하다 폐교를 한 숭의여학교는 1953년 4월, 박현숙 선생이 재단법인 숭의학원을 설립함에 따라 숭의여자고등학교로 재건되었다. 신사참배 터 숭의학원 설립. 그 자리는 우연히도 일제의 탄압을 상징했던 남산 캠퍼스, 경성 신사 자리였다. 숭의인들은 1955년 11월 23일 교사 건축공사의 첫 작업으로 신사 건물을 철거하며 다시 부활한 그리스도를 생각하면서 감사의 눈물을 흘렸다. 1924년 유치원 교사를 양성할 목적으로 보육과를 설치한 이후 재건 후에도 이 전통을 계승하고자 보육학교 설립이 추진되었다. 재건을 준비하던 당시 숭의여학교 출신인 이영보 선생이 한국 보육학원을 운영하고 있었고, 이를 숭의학원이 흡수 통합해 ‘숭의보육학교’가 출범한다. 이후, ‘숭의보육전문학교’ ‘숭의여자전문학교’를 거치며 학과 증설이 이뤄지고, 현재의 ‘숭의여자대학교’가 됐다. 한편, 1999년 5월 7일 이사장 취임식 예배가 열렸다. 그 자리에서 백성학 이사장은 “숭의 건학이념의 뜻이 깊다. 하나님이 좋아하는 학교, 하나님이 기뻐하셔 언제든지 복을 내려 주시는 학교로 만들어가겠다.”라고 취임사를 전했다. 숭의 인물관. 숭의여자대학교 캠퍼스 내에 위치한 숭의 인물관은 숭의를 통하여 의를 실천하고 신앙과 조국을 사랑한 인문들을 기리는 기념관이다. 기존의 김옥길 기념실과 홍종명 갤러리를 확장하고, 마펫 기념실과 박현숙 기념실, 평양 숭의 인물실을 추가하여 총 5개의 전시실로 구성되어 있다. 숭의 마펫 기념 교회. 숭의마펫기념교회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와 섬세한 인도 가운데 창립된 교회이다. 숭의 학교는 서울로 옮겨와 남산에 있던 일제의 신사참배 자리에,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만 섬기겠다.”고 고백한 살아있는 신앙의 학교이다. 이러한 영적 사명을 이어가기 위하여 숭의 마펫 기념교회는 2011년 1월 2일 설립되어 하나님의 높은 뜻과 목적을 이루어 가고자 하고 있다. 섬김과 나눔의 실천을 위해 헌금의 70% 이상을 이웃과 민족과 세상을 위해 나누고 베푸는데 쓰고 있다. 한편, 숭의여자대학교 공식 홈페이지와 캠퍼스 내에 위치한 숭의 인물관에서 숭의여자대학교의 기독교 역사에 대해 더 자세히 알 수 있다. 숭의여자대학교는 기독교 정신에 입각하여 다수의 독립유공자를 배출하기도 했으며, 그 역사 또한 깊다. 현재에도 많은 여성 인재를 배출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앞으로도 위와 같은 기독교 대학들이 기독교 인재들을 많이 배출해 기독교를 알리고 발전시키는데 큰 힘이 되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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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 이야기는 화수분…판타지·통속·액션으로 응용 중'도둑놈 도둑님' '시카고 타자기' '군함도' '박열' '자전차왕 엄복동' "조선총독부가 없어졌단 말입니까? 그럼 지금의 광화문엔 뭐가 있습니까?"일제시대에 죽었다가 2017년에 유령이 돼 나타난 '경성 보이'는 조선총독부 건물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80년 만에 알게 되자 대경실색한다. 유령은 자기 눈으로 확인하겠다며 광화문으로 달려갔고 "정말 없어졌네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바칠 게 청춘밖에 없어서 수많은 젊음이 사라졌는데 해냈네요. 우리가"라며 감격하며 기념사진을 찍는다. 지난 3일 막을 내린 tvN '시카고 타자기'의 한 장면이다. 일제시대를 소재로 한 드라마와 영화가 끊임없이 응용을 거듭하며 시청자와 관객을 만나고 있다. 여전히 독립운동가들의 활약상을 다룬 정통 드라마가 주를 이루고 있지만, 최근에는 판타지와 통속, 액션, 코미디 등 다양한 색깔을 입힌 응용편이 등장하고 있다. ◇ 유령 판타지로, 주말 통속극으로'시카고 타자기'는 일제시대를 판타지의 배경으로 활용했다. 시간여행을 소재로 한 이 드라마는 현대와 일제치하 경성을 오가며 주인공들의 전생이 현생과 이어지고 있는 이야기를 그려냈다. 과거의 독립운동가와 친일파가 현재에서도 악연으로 연을 맺는 이야기가 그려졌는데, 작가는 과거에 벌을 주지 못한 친일파를 현재에서 벌 줬다. 또한 그 과정에서 인물들의 전생의 인연을 베일 속에 가려두고 퍼즐 조각을 맞춰나가듯 걸어나갔다. 드라마는 결국 전생에 조국의 해방을 눈으로 보지 못하고 죽은 독립운동가들이 현생에서 다시 만나, 늦었지만 구원을 속 시원히 풀고 해방된 조국 아래에서 함께 살아가는 기쁨을 누리도록 했다. MBC TV 주말극 '도둑놈 도둑님'은 전형적인 통속 주말극에서 독립군과 친일파의 이야기를 풀어간다는 데 방점이 찍힌다. 1945년 의열단의 이야기에서 출발하는 드라마는 독립운동가 후손과 친일파 후손이 극과 극의 삶을 살고 있는 현실을 대비하며 이를 선악 구도로 끌고 나간다. 극중 독립운동가들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헌신했지만, 그 후손들은 생계가 어려운 삶을 살며 '장발장 형 도둑'으로 전락했다. 반면, 나라를 팔아먹고 호의호식했던 친일파들은 대대손손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다. 제작진은 실제 독립운동가 후손들을 취재하고, 여기에 비일비재한 가진 자들의 횡포를 섞어 이야기를 만들어나가고 있다고 밝혔다. 독립운동가 후손과 친일파 후손의 삶을 자극적으로 대비시키고, 그들이 관련을 맺게 되는 이야기를 그려나가기 위해 친일파 후손에 의한 폭행, 살인, 납치, 승부조작, 누명 등 온갖 악질적인 막장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도둑놈 도둑님'의 오경훈 PD는 앞서 제작발표회에서 "지금 우리 사회에서 발생하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이 어디서 시작됐을까에 대한 고민에서 출발한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주말극 주 시청층을 잡기 위해서는 막장적 요소를 넣지 않고는 어려운 현실적인 측면이 있다. 그런 부분은 감안하고 봐주시면 좋겠다"고 말했다. ◇ 통쾌한 액션·코미디도 섞어…새로운 영웅도 찾아내 통쾌한 액션과 코미디도 등장한다. 과거의 콘텐츠들이 주로 '비장함'에서 막을 내렸다면, 최근 콘텐츠는 통쾌함을 강조하는 측면이 강해졌다. '도둑놈 도둑님'은 친일파 후손을 단죄하기 위해 독립운동가의 후손이 '도둑 J'로 변신해 의적 홍길동처럼 활약하게 된다. 정치인의 비자금을 훔쳐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재벌의 비리를 파헤치는 '도둑 J'의 활약이 시작됐다. 이 과정에서 코미디도 양념으로 곳곳에 잘 배합됐다. 다음달 개봉하는 영화 '군함도'는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일본 군함도(하시마 섬)에 강제징용된 조선인들이 목숨을 걸고 탈출을 시도하는 이야기를 그린다. 액션이 주를 이룬 작품으로, 배우들은 촬영을 앞두고 액션 연습에 심혈을 기울였다.앞서 등장했던 일제시대 배경 영화 '암살', '밀정'과 비교해 고강도의 액션이 기대되는 작품이다. 연출을 맡은 류승완 감독이 액션을 사랑하는 감독인 만큼 그가 그리는 독립운동가의 이야기도 '몸으로 말하는 장면'들이 강조될 전망이다. 영화 '박열'새로운 영웅도 찾는 움직임도 활발하다. 오는 28일 개봉하는 '박열'과 촬영에 한창인 '자전차왕 엄복동'은 모두 대중에게 친숙하지 않지만, 일제시대 활약했던 실존인물을 조명한 작품이다. '군함도'가 역사적 사실 위에 창작된 이야기를 그린 반면, '박열'과 '자전차왕 엄복동'은 실존인물을 찾아내 그들의 영웅적인 스토리를 통쾌하게 조명한다. '자전차왕 엄복동' 제작진은 16일 "역사적 사실 위에 스포츠 영화 특유의 통쾌함을 더하고, 코미디도 버무렸다"고 설명했다. ◇'감상적인 민족주의'는 경계해야…결국은 탄탄한 스토리 스포츠에서 한-일 국가대항전이 언제나 큰 관심을 받듯, 독립운동가들의 활약상을 다룬 이야기 역시 기본적으로 대중의 관심을 끌게 된다. 그런 면에서 '감상적인 민족주의'는 경계해야 한다는 지적이 늘 나온다. 또 역사적 사실만 나열하거나, 이분법적 선악 구도에만 기대서는 드라마나 영화 콘텐츠로서 경쟁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시카고 타자기'는 일제시대를 판타지로 요리해 드라마 소재를 확장시켰지만, 이야기 자체의 힘이 떨어지면서 시청률 1~2%에 머물고 말았다. 이 드라마는 마지막회에서 "해방된 조선에서 마음껏 행복하십시오"라는 자막을 내보냈는데, 지지부진한 스토리로 막을 내리면서 그 감격스러운 문구가 이렇다 할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다. '군함도'의 류승완 감독은 15일 제작보고회에서 "이 영화는 극단적인 민족주의에 의존하거나 감성팔이, 그리고 소위 말하는 '국뽕'에 의존하는 영화는 아니다"고 선을 그었다. 류 감독은 "보편적인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태도와 마음에 관한 이야기다. 전쟁이 인간을 얼마나 괴물을 만드는 것이냐에 관한 이야기"라고 소개했다. 한 드라마 제작사 대표는 "독립운동가라는 소재는 매력적이지만 결국은 탄탄한 스토리가 관건 아니겠냐"며 "높아진 대중의 눈높이에 맞추기 위해서는 결국 스토리로 대결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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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 여성비행사' 독립운동가 권기옥을 아시나요숭의여학교 시절 3·1운동 주도…'조선총독부 폭파' 목표로 항일투쟁4월 기념사업회 창립목표 준비위 활동…"선생 강조한 극일정신 알릴 것" '한국 최초 여성비행사' 권기옥 선생 [연합뉴스 자료사진]한국 최초의 여성비행사로 활약한 독립운동가 권기옥(1901∼1988) 선생을 기리는 기념사업회가 출범한다.권기옥기념사업 준비위원회는 "권 선생의 생애와 정신을 널리 알려 되살리고 이를 실천하기 위한 기념사업회를 4월 창립할 계획"이라고 28일 밝혔다. 준비위는 채현국 효암학원 이사장, 권기옥 평전을 쓴 정혜주 작가, 하늘자연 출판사 정근화 대표, 도종환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 숭실대 황민호 역사학과 교수, 권 선생과 함께 활동한 독립운동가 유족들이 참여하기로 했다. 채 이사장은 부친이 권 선생의 남편인 독립운동가 이상정(1896∼1947, 시인 이상화의 형) 선생의 제자인 점이 인연이 돼 참여한 것으로 알려졌다.권 선생의 기일이 4월19일이고 이상정 선생이 4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돼 기념사업회도 4월에 창립하기로 했다.1901년 평양에서 태어난 권 선생은 1919년 숭의여학교 재학 중 3·1 운동을 주도했다. 세상을 떠나기 몇 해 전 연합뉴스 인터뷰에서 "한없이 '독립 만세'를 외치며 북받쳐 오르던 감격의 도가니 속이 지금도 선하게 떠오른다"고 전하기도 했다.이후 평남도청 폭파사건에 관여한 혐의로 일제에 쫓기다 1920년 중국으로 망명했다. 조선총독부를 공중에서 폭파하겠다는 생각을 품고 1923년 중국 남서부의 윈난육군항공학교에 입학했다. 1925년 2월 졸업한 권 선생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비행사로 기록됐다. '최초 여성비행사' 증명하는 권기옥 선생 비행학교 필업증서 [연합뉴스 자료사진]중국 공군에 10여 년간 몸을 담고서 항일전선에서 싸우고 무공훈장을 받았다. 해방 이후 귀국한 권 선생은 국회 국방위원회 전문위원으로 임명돼 초창기 군 조직과 공군 창설에 이바지했고 6·25전쟁 때는 전선을 누비기도 했다. 1977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국민장(1990년 독립장으로 조정)을 받았고 1988년 타계하며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묘역에 안장됐다.권 선생이 이처럼 독립운동사뿐 아니라 여성사에서 이름을 남겼지만 오히려 일제에 부역한 것으로 알려진 민간 여성비행사 박경원을 다룬 영화 '청연'이 2005년 개봉하면서 세간에는 아직도 박경원을 최초의 여성비행사라고 알고 있는 사람도 적지 않다고 한다.정혜주 작가는 "일본 비행학교를 나와 일제를 선전하는 비행을 하다가 죽은 박경원을 미화한 영화를 보고 자랑스러운 역사인 권기옥을 더 빨리 많이 알려야겠다는 생각에서 평전을 썼고 기념사업회까지 이어지게 됐다"고 전했다.기념사업회는 권 선생이 전 재산을 털어 서울대와 항공대 대학생에게 장학금을 지급하던 사업을 이어받아 중고생 장학금을 지원하고, 권 선생처럼 살다간 여성 독립운동가를 발굴해 알리고 출판하는 사업을 계획 중이다.또 권 선생이 주로 활동한 중국 쿤밍, 상하이, 항저우, 난징, 충칭 등에서 자료 기증이나 전시, 강좌, 답사 등을 하고 권 선생 관련 뮤지컬과 연극 공연도 검토 중이다.정 작가는 "선생은 해방 이후에도 일본을 극복해야 한다는 의미의 극일 정신을 강조하셨다"며 "그가 꿈꾼 민족의 화합과 자주 독립국가 건설은 아직도 유효한 일인 만큼 기념사업회가 실천적으로 꿈을 키워나가겠다"고 밝혔다.기념사업회 준비중인 정근화 사무국장과 정혜주 작가(서울=연합뉴스) 채새롬 기자 = 권기옥 기념사업회를 준비중인 정혜주 작가는 "권기옥 선생은 해방이후에도 일본을 극복해야 한다는 의미의 극일 정신을 강조하셨다"며 "그가 꿈꿨던 민족의 화합과 자주 독립국가 건설은 아직도 유효한 일인 만큼 기념사업회가 실천적으로 꿈을 키워나가겠다"고 밝혔다. 2017.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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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따라 멋따라> '붉음에 흠뻑 취한다' 천안 독립기념관 단풍길산책길 3.2km '황홀경'…조선총독부 건물 잔해 등도 볼거리 '너 보고 싶은 마음 눌러 죽여야겠다고/ 가을 산 중턱에서 찬비를 맞네/ 오도 가도 못하고 주저앉지도 못하고/ 너하고 나 사이에 속수무책 내리는 / 빗소리 몸으로 받고 서 있는 동안/ 이것 봐, 이것 봐 몸이 벌겋게 달아오르네/ 단풍나무 혼자서 온몸 벌겋게 달아오르네. (안도현 '단풍나무 한 그루')시인 안도현은 단풍나무 혼자서 벌겋게 달아오른다고 했다. '어라~ 벌겋게 물들었네' (천안=연합뉴스) 김용윤 기자 = 독립기념관 단풍나무길은 해마다 11월초에서 중순 벌겋게 달아오른다. 사진은 지난해 단풍공모전 입상작 중 하나. [독립기념관 제공=연합뉴스]충남 천안시 목천읍 흑성산 자락 독립기념관 뒤편 단풍나무 길의 단풍나무도 무려 2천 그루가 열병식을 하듯 늘어서 '붉음'에 흠뻑 취해간다.달아오른 단풍나무 가지가 늘어져 터널을 이룰 정도다. 천안에서 취암산 터널을 빠져나가면 자동차로 5분이면 도착할 수 있다. 아우내장터 만세 소리에 귀가 쟁쟁할 삼일절이나 태극기 함성으로 온 나라가 뒤덮였을 광복절 때보다 이맘때인 11월 초에 독립기념관에 더 많이 관람객이 몰린다.아이부터 백발이 성성한 어르신에 이르기까지 모두 기념관 주변 3.2km에 달하는 단풍나무 길을 걸으려는 사람들이다.지난 1995년 4월 독립기념관 직원들의 식목행사로 심은 단풍나무가 20년 넘게 자라면서 제법 그루터기가 굵어지는가 싶더니 어느새 입소문을 탔다. 사실 이곳은 국내 어느 단풍길과 비교해도 빠지지 않는다.이곳 도로 옆으로 심어진 단풍나무는 봄·여름에는 파랗지만, 가을에는 어김없이 빨갛게 물드는 고유수종 청단풍이다.흔히 '노무라 단풍'으로 알려진 일본 단풍이 봄·여름·가을 할 것 없이 붉은 빛을 띠는 것과 확연하게 구분된다.해발 519m의 흑성산 자락에 있는 탓에 설악산 단풍이 시들해질 때인 10월 말부터 11월 초 사이에 독립기념관 단풍나무 길은 더욱 붉다. 올해는 1주일가량 늦었다.독립기념관의 상징이자 중심 기념 홀 역할을 하는 '겨레의 집'을 중심으로 둥글게 난 길은 흑성산 가는 길과 어우러져 단풍나무만 보기에 단조로운 이들에게 또 다른 즐거움을 준다.서문에서 들어오자마자 만날 수 있는 흑성산 가는 길 A 코스는 2.5km에 이르는데, 억새밭과 구불구불 난 폭 2m 여가 되는 길을 걷는 재미가 쏠쏠하다. 고즈넉하고 잡목들이 풍기는 냄새가 그럴듯한데 인근 신계리 주민들이 아침저녁으로 산책할 뿐 외부 사람들에게는 그리 알려지지 않아서 한 번쯤 걸어볼 만하다.B 코스와 C 코스는 단풍나무 길을 걷다 옆으로 빠질 수 있다.A 코스가 능선을 타고 느긋하게 올라갈 수 있다면 두 코스는 단풍나무 길과 함께 산행을 즐길 수 있는 매력이 있는데 역시 정상까지 오르는 데 1시간이면 충분하다. '저것도 곧 물들겠다'(천안=연합뉴스) 김용윤 기자 = 단풍길 산책에 나선 시민들이 독립기념관에서 가을 정취를 즐기고 있다. 2016.11.5. yykim@yna.co.kr기왕 독립기념관에 왔다면 단풍만 보고 그냥 갈 일은 아니다.동양 최대의 기와집 '겨레의 집'은 반드시 봐야 할 곳이다. 길이 126m, 폭 68m 크기로 축구장만 한 이 건축물은 45m 높이로 아파트 15층에 육박하는데 예산 수덕사 대웅전을 본떠 설계한 한식 맞배지붕 건물로 중국 베이징 천안문보다 더 크다고 알려졌다.별걸 다 기억하는 사람들은 이 건축물이 독립기념관 개관을 코앞에 둔 지난 1986년 8월 어느 날 밤 큰불이 나 한바탕 난리가 난 기억을 더듬을 수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냥 모르고 지나친다.독립기념관은 그런 연유로 1년 늦은 1987년 8월 15일 문을 열어야 했다.겨레의 집 내부에서는 불굴의 독립정신과 강인한 한국인 상을 상징하는 상징조형물 '불굴의 한국인 상'을 만날 수 있다.무게가 개당 3∼4t이나 되는 화강암 덩어리 274개를 쌓아 올려 하나의 군상을 이뤘다.조각가 고 김영중(1926∼2005)이 제작한 이 작품은 뒷면에 백두산 천지 부조와 함께 창공으로 용솟음치는 듯한 이미지가 볼 만하고 양쪽에 억압의 사슬을 끊고 자유독립을 위해 나가려는 독립투사들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 부재 전시공원 [독립기념관 제공=연합뉴스]겨레의 집 오른쪽에서는 낯선 비행기 한 대를 만날 수 있다.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 부주석 김규식, 국무위원 이시영 선생 등 15명이 타고 중국 상하이(上海)를 출발, 1945년 11월 23일 김포비행장에 내린 이 비행기 C-47은 당시 주한 미군 사령관 겸 군정청 사령관 리드 하지 장군이 제공했다.김구재단이 당시 기종과 똑같은 모델을 수소문 끝에 미국에서 구입, 분해해 공수했고 지난 4월 전시됐으니 '영구계류 중'인 셈이다.C-47기 반대편 서쪽으로 발길을 옮기면 어디선가 본 듯 낯익으면서도 스산한 느낌의 석조물이 전시돼있다.일제의 잔재를 청산하고 민족정기를 회복한다는 취지로 지난 1995년 8월 15일 광복절 50주년을 기념해 서울 광화문에서 철거된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 부재 전시공원이다.철거 3년만인 1998년 8월 일부러 해가 지는 쪽 후미진 구석으로 옮겼다. 총독부 건물 돔 꼭대기에 있던 첨탑은 철거된 잔해를 전시할 때 염두에 뒀던 것이 '홀대'였던 만큼 지하 5m 깊이의 낮은 땅에 세워졌고, 다른 부재 조각들도 온전하지 않은 채 흩어져 서 있거나 누워있다. 캠핑장의 가을(천안=연합뉴스) 김용윤 기자 = 독립기념관 캠핑장은 도심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아 인기다. 2016.11.5. yykim@yna.co.kr독립기념관은 애국애족만을 강조하지 않아 캠퍼들에게는 이미 낯익은 곳이다.7만2천여㎡ 넓은 땅에 조성된 서곡(西谷) 야영장은 주말이면 최대 수용인원 600명을 다 채울 정도로 인기가 있고, 11월 말까지만 개장하기 때문에 요즘 주말이면 더욱 북적거린다. 단풍놀이와 기념관 관람으로 출출해졌다면 목천읍 사무소 앞 청국장집으로 발길을 돌려볼 만하다.30년 된 청국장집인데, 동네 사람들에게는 '욕쟁이 집'으로 통한다. 손님들이 앉은뱅이 식탁 위에 놓인 반찬 그릇을 옮겨놓으려고 손을 댈라치면 어느새 주인아주머니의 불호령이 떨어지니 조심(?)해야 한다.독립기념관 서문에서 1km 남짓 떨어진 신계리 돼지 주물럭집도 맛집 중 하나다.흔히 '짜글이'라고도 하는데 고추장 양념 돼지고기 삼겹살을 지글지글 전골냄비에 익혀 먹는 재미가 쏠쏠하고, 천안으로 돌아가는 길에 취암산 터널 직전에서 오른쪽으로 빠져 산 중턱에 있는 카페에서 커피를 한 잔 해도 좋다. 풍광과 야경이 아주 빼어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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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 속 '존재감' 과시하는 일본 배우들(서울=연합뉴스) 조재영 기자 = 최근 한국영화를 보면 일본 배우들이 심심찮게 등장한다.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시대극이 많이 제작된 측면도 있지만, 시대극이 아닌 영화에서도 일본 배우들은 이색적인 배역을 맡으며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25일 개봉하는 영화 '최악의 하루'(김종관 감독)에는 배우 이와세 료가 출연한다. 영화 '최악의 하루'에서 이와세 료(왼쪽)와 한예리(오른쪽)이와세 료로서는 지난해 개봉한 '한여름의 판타지아'(장건재 감독)에 이은 두 번째 한국영화 출연이다. 3만6천명의 관객을 동원한 '한여름의 판타지아'는 독립 예술영화 중에는 흥행작으로 꼽힌다. 이 영화를 본 김종관 감독이 이와세 료를 적극적으로 캐스팅했다. '최악의 하루'는 배우 지망생 '은희'(한예리)가 오늘 처음 본 남자와 현재의 남자 친구, 한때 만났던 남자를 하루 동안 잇따라 만나면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그린 멜로 영화다. 이와세 료는 서울에서 '은희'를 처음 만난 일본인 소설가로 나와 서툰 영어로 '은희'와 대화를 나눈다. 온종일 한국 남자들과 피곤한 감정싸움을 한 '은희'는 오히려 말이 통하지 않는 이와세 료에게 위안을 얻는다 이와세 료는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 모든 캐릭터가 다 매력적이라고 느꼈다"면서 "과장하지 않고 제 모습 있는 그대로 연기하려 노력했다"고 말했다.김종관 감독은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과 오히려 더 잘 '통하는' 관계를 묘사하려고 일부러 일본인 캐릭터를 설정했다"고 설명했다.이와세 료는 일본에서 톱배우는 아니지만, 연극과 영화, 다수의 작품에서 개성 있는 연기로 인지도를 쌓아가고 있다.500만 관객 동원을 눈앞에 둔 영화 '덕혜옹주'(허진호 감독)에서도 일본인 배우가 나온다.영친왕의 부인인 '이방자' 여사 역을 일본배우 토다 나호가 맡았다. 토다 나호는 허진호 감독의 동명 영화를 리메이크한 일본판 '8월의 크리스마스'에 출연한 인연으로 이번 영화에도 출연했다. 덕혜옹주의 일본인 남편 '소 다케유키' 역할을 한 배우는 한국 배우 김재욱이다. 김재욱은 유창한 일본어 때문에 일본인처럼 보이지만, 어렸을 때 일본에 살아 일본인 못지않은 일본어 실력을 갖췄다.다음 달 7일 스크린에 내걸리는 김지운 감독의 신작 '밀정'에서는 일본 배우 츠루미 신고가 얼굴을 내민다.츠루미 신고는 '데스노트 - L: 새로운 시작', '히어로' 등 다양한 장르의 영화와 드라마에 출연한 일본의 중견 배우다. 2011년에는 한국영화 '마이웨이'를 통해 한국 관객과 만난 적이 있다. 영화 '밀정'에서 츠루미 신고 그는 '밀정'에서 조선총독부 경무국 부장 '히가시'역을 맡아 카리스마를 선보인다. '히가시'는 '이정출'(송강호)에게 밀정이 돼 의열단의 전모를 캐도록 지시하는 인물이다. 김지운 감독은 NHK 대하사극을 통해 츠루미 신고를 발견하고는 곧바로 출연 제의를 했다. 츠루미 신고는 제작진에 "한국영화 스타일과 스태프들의 열정에 큰 관심이 있었다"면서 "김 감독의 전작들을 봤고, 굉장히 폭넓은 연출을 하는 분이라고 생각해 꼭 출연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지난 5월 개봉한 나홍진 감독의 영화 '곡성'에는 일본 배우 쿠니무라 준이 출연해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곡성'은 평온한 농촌 마을에 외지인이 나타난 뒤 연이어 발생한 괴이한 살인사건을 다룬 영화로, 쿠니무라 준은 외지인 역할을 맡아 극의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쿠니무라 준은 당시 영화 촬영의 어려움을 토로하면서도 "한국영화 섭외가 또 들어온다면 다시 해보고 싶다"고 언급한 바 있다. 영화 '곡성'에 출연한 쿠니무라 준 일본 배우들이 한국영화에 흔쾌히 출연하는 것은 한국영화와 한국감독들의 높아진 위상 덕분이기도 하다. 영화계 관계자는 "양국 배우들의 스크린 교류가 보다 활발해지면 한국영화계의 위상도 더 높아지고 양국 문화 교류 전반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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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경성도 전세난에 월급 23% 주거비로"물가상승에 전세→월세 전환"…이승일 교수 분석 (서울=연합뉴스) 김계연 기자 = "작금의 경성은 사글세집이 다 나가고 업서서 전세가 엇지나 빗싸젓는지 주택난과 아울너서 이중 고통을 밧고 잇는 현상이여서 이대로 방님아얏다가는 중대한 사회문제를 야긔할 염녀가 잇다하야…집주인들은 물가가 앙등한다는 것을 핑계삼어서 인위적으로 집세를 올려가지고 하급 쌀라리맨을 궁핍한 구렁으로 노라너헛슬뿐만 아니라…"(매일신보 1937년 5월20일자)1930년대 일제 치하 경성의 주거난이 오늘날 서울처럼 심각했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요즘 말로 중산층에 해당하는 조선총독부·경성부(京城府) 직원도 다를 바 없었다.7일 이승일 강릉원주대 사학과 교수의 논문 '1930∼1940년대 경성 거주 급여 생활자의 주거 생활'에 따르면 1939년 경성부에는 77만4천286명, 15만4천223세대가 살았는데 가옥 수는 8만5천464동에 불과했다.본인 소유 가옥이 없는 부민들은 집세를 지불하고 거주(차가·借家)하거나 방 한두 칸을 빌려 셋방살이(간차·間借)를 했다. 주거비를 정기적으로 내지 못하는 빈민층은 하숙·여관·기숙사, 심지어 토막(土幕)에서 생활하는가 하면 집주인에게 노동력을 제공하는 대신 방 한 칸을 빌려 살기도 했다.당시 신문기사 등을 종합하면 경성 인구 70여만명의 60%인 42만명이 제집 없이 차가 등으로 생활했다고 논문은 분석했다. 서울시가 지난해 발표한 서울시민의 자가주택 보유비율은 41.2%였다.주택임대 방식이 전세에서 월세로 전환되는 시기라는 점도 오늘날과 비슷했다. 당시 전세는 가옥 소유자가 돈을 빌리면 채권자는 이자를 받지 않고 가옥에 거주하는 형태였다. '전세가율'은 50∼70% 정도였다.집주인들이 점차 월세를 선호하게 된 데는 매일신보가 지적하듯 물가상승의 영향이 컸다. 집주인 입장에서는 상대적으로 임차 기간이 긴 전세가 불리했다. 게다가 월세의 경우 계약기간이 없어 더 비싼 임차료를 부르는 세입자가 나타나면 아무 때나 계약해지가 가능했다. 일본인들이 서울의 가옥을 대거 사들이면서 일본의 월세 관행이 유입된 탓도 있었다.공무원들도 월급의 4분의 1가량을 주거비로 지출하며 팍팍한 생활을 했다. 여기에는 일본인 직원과의 차별대우도 한몫했다.조선후생협회가 1940년 3월 조선총독부·경기도청·경성부청 직원 1천953명의 주거 실태를 조사한 결과 조선인은 월평균 61.59엔을 벌어 14.12엔(22.9%)을 차가 등 주거비로 지출했다.반면 일본인 직원의 수입은 127.78엔으로 조선인의 배를 웃돌았다. 주거비로는 평균 23.84엔을 썼는데 그만큼 넓은 집에 살았기 때문이다. 조선인은 상대적으로 좁은 집에 거주하면서도 가족 수는 일본인(4.28명)보다 많은 평균 6.14명이었다.조선총독부는 산업계에 주택건설을 독려하고 임대료 인상 폭을 제한하기도 했지만 별다른 효과를 보지는 못했다. 1930년대 중반 경성 인구가 매년 4만명씩 증가한 데 비해 주택은 한 해 2천호 정도 느는 데 그쳤다. 집주인들은 행정단속을 피해 임대료를 올렸는데 이는 집주인들의 욕심이 아니라 경제정책에 따른 물가상승 탓이라고 논문은 분석했다.이 교수는 '경성부 호구통계' 등 자료를 토대로 당시 경성의 주거난에 대해 "조선총독부가 조선인의 주거 환경을 개선하려는 정책적 의지가 박약했음을 보여준다. 조선인을 위한 값싼 임대용 주택 건설은 제대로 추진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이 논문은 부산대 한국민족문화연구소가 발행하는 계간 '한국민족문화' 최근호에 실렸다.1930년대 서울 마포 일대 [연합뉴스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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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때 조선 산림녹화에 힘쓴 日人…아사카와 다쿠미를 아시나요유언에 따라 조선 땅 망우리 공원에 묻혀…오늘 85주기 맞아 추모식친형 노리타카가 1945년 한국 떠나며 묘역서 읊은 시도 첫 공개 (서울=연합뉴스) 김은경 기자 = 한용운·방정환 등 독립운동가들이 묻힌 중랑구 망우리 공원에는 아주 이례적으로 일본인의 묘도 있다.묘의 주인은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한국 사람의 '진정한 친구'로 살았던 아사카와 다쿠미(淺川巧·1891∼1931)이다.다쿠미는 조선총독부 임업연구소에서 근무하며 당시로는 획기적인 '오엽송 노천매장법'이라는 양묘법을 개발했다. 그는 이를 활용해 조선 산림녹화에 힘썼다. 이 덕분에 일본의 목재 수탈로 헐벗은 우리나라 산들은 푸름을 되찾았다.경기도 광릉의 수목원도 그의 손을 거쳐 탄생했고, 국립산림과학원 정원의 유명한 1892년생 소나무(盤松)도 1922년 홍파초등학교에 있던 것을 그가 옮겨 심은 것이다. 다쿠미는 조선 도자기에 매료된 친형 아사카와 노리타카(淺川伯敎·1884~1964)와 함께 조선 문화예술 보존에 기여한 것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는다.아사카와 다쿠미·노리타카 형제. 오른쪽이 다쿠미. [연합뉴스 자료사진]다쿠미는 '조선의 소반', '조선도자명고'와 같은 조선 도자와 민예에 관한 책을 출간하는 등 조선 문화재 연구 성과를 담은 여러 글을 남겼다.아사카와 형제는 오늘날 국립민속박물관의 기원이 된 '조선민족미술관'을 건립해 자신들이 모은 각종 민예품 수천 점을 기증하기도 했다.다쿠미는 1931년 식목일 행사를 준비하다 41세의 젊은 나이로 숨지면서 "조선식 장례로 조선에 묻어달라"고 유언했다.유언대로 자신이 살던 경기도 이문리에 묻혔다가 몇 년 후 망우리 공원으로 옮겨졌다. 이 공원에는 다쿠미 묘 외에 한반도에 포플러와 아카시아를 처음 심은 사이토 오토사쿠의 비석도 남아있다. 사이토 오토사쿠도 이 공원에 묻힌 것으로 알려졌으나 아직 묘를 찾지못하고 있다.다쿠미 묘지 옆 추모비에는 '한국의 산과 민예를 사랑하고 한국인의 마음 속에 살다 간 일본인, 여기 한국의 흙이 되다'라는 글이 적혔다.망우리 공원묘지에 묻힌 유일한 일본인 다쿠미의 묘 묘역에는 그를 기리려는 한국인과 일본인 방문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지난해 고향인 일본 야마나시(山梨)현 호쿠토(北杜)시의 지원으로 정비돼 방문객이 좀 더 편히 찾을 수 있는 공간으로 탈바꿈했다.다쿠미를 조명한 영화와 책이 만들어지고 추모제와 학술회의가 열리는 등 그를 기리려는 움직임은 계속되고 있으나, 그의 업적이나 영향에 대한 연구는 사실상 명맥이 끊긴 상태다.다쿠미 전문가인 김석권 전 국립산림과학원 박사는 "수많은 임업 기술을 개발했고, 광릉 수목원도 모두 다쿠미 작품인데 산림청에도, 학계에도 그를 연구하는 사람이 없다"며 "일본인이라서 불편해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며 안타까워했다.올해는 다쿠미가 세상을 뜬지 85주년이 되는 해다. 그의 기일인 2일에는 노리다카·다쿠미 형제 현창회가 다쿠미 묘역에서 추모식을 연다.추모식에는 조만제 현창회 회장과 강지원 '이수현의인문화재단' 설립위원장, 청리은하숙 세계시민학교 학생 등이 참석한다. 두 형제의 고향인 호쿠토시의 아사카와 형제 추모회도 추모사를 보내왔다.노치환 현창회 사무총장은 추모식에서 노리타카가 1945년 일제의 패망으로 조선을 떠나게 되자 다쿠미의 묘 앞에서 언제 다시 올 수 있을지 기약할 수 없는 심경을 담아 읊은 시를 처음으로 공개한다. "묘에 핀 들꽃 우리에게 바치고 고이 잠들게. 언젠가 찾아와 줄 사람이 있을 테니."식목일인 5일에도 국제친선협회 주최로 다쿠미 추모식이 열린다.이 자리에는 이순주 서울국제친선협회 회장, 윤태운 한국도예협회 회장, 신현고 학생들과 호쿠토시의 부시장 및 공무원 등이 참석할 예정이다.